3.
나는 10살 이전으로 많이 다쳤었다. 덤벙대고 매일 달리고 이런게 아니라 호기심이 많아서 였다. 궁금하고 다가가고 위험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잘 안했던거 같다. 재미있을것 같으면 해봤다.
7살때 자전거를 아직 못타던 때였다.할머니집에 놀러갔다가 나는 사촌오빠가 두발 자전거를 탈수있다는 자랑에 할머니집에 있는 두발 자전거를 가리키면서 "나 저거 태워줘!! 뒤애 태워죠!" 라고 말했고 나를 태워준다고 해서 바로 뒤로 올라탔다. 오빠는 처음에는 천천히 가다가 점점더 속도를 내었고 나는 무서워서 발을 안으로 모아버렸다. 그러자 말자 내 발은 바퀴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왼쪽 바깥 복숭아뼈가 다 까졌다. 이일이 있고 나서 나는 절대로 자전거 뒤에는 타지 않고 앞에만 무조건 타서 내가 자전거를 이끌었다.
이일이 있고 여름 나는 부곡하와이에서 파도풀장에 구명조끼도 안입고 사촌동생의 튜브 뒤에 의지해서 깊은곳으로 가고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한테 내몸이 치이고 그대로 물안으로 빠졌다. 안전요원이 근처에 있었지만 인파에 나를 발견하지 못했고,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보고 있던건 아빠였다. 내가 빠지자말자 (아직도 기억이 난다.) 저멀리서 아빠는 온힘을 다해 소리치고 사람들을 밀치며 나에게 달려왔다. 도착하자말자 나를 들어올렸고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대로 밖으로 나와 계속 울었다.
또 하나가 더 있다. 10살무렵 나는 학원버스에서 내리다 그 사이로 지나오는 오토바이에 치였던 적이 있다. 앞으로 날아갔고 팔은 다 쓸리고 이빨은 흔들렸다. 아픈게 싫었고 그당시 넘어지고 데이고 다치고 했던 적이 많아 혼이 날까봐 .놀란 버스아저씨를 뒤로하고 집으로 갔다. 그날은 이모도 없고 부모님도 없어서 쓸린 팔을 물로 씻어내고 이빨을 혀로 툭툭 건드리며 티비를 보고 있었다. 학원에서 연락을 받은 부모님이 바로 집으로 달려오셨고 나를 데리고 치과를 가고 상처를 치료했다.
사고도 당하고, 피도 나보고, 무서워 하는것이 생길수도 있는 나이였고, 두려워서 가까이 다가가지 못할것들이 생길수도 있는 나이였다. 어린나이였지만 그후로 자전거는 안탈려고 하고 물은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 않을려고 했다. 버스를 내릴때도 옆을 보게 되었고, 오토바이에 데였던 적도 있는데 이 후로 오토바이옆에는 가지 않았다(이건 아직도 그렇다.)
하지만 부모님은 단호했다. 무서운것은 극복하라고 니가 그걸 니껄로 만들라고. 자전거를 무서워하자 두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도와주셨고, 물을 무서워하자 수영장에 등록시켜 자유형까지 할 수 있게 해주셨다. 그래서 지금은 어딜가든 자전거를 타고 여름이면 수영장을 가서 혼자라도 수영을 하고 온다.
다치고 피가나고 아팠던 기억은 트라우마가 될수 있다. 하지만 대처하는 방법에 따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더 힘든 기억이 있을수도 있고, 여전히 무서울수도 있다.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의 차이이고 그들이 그렇게 되고 싶어서 된게 아니다. 하지만 노력을 해본다는건 극복할려는 의지라고 생각한다.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극복할려고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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